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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마을에서 하룻밤 – 일본 나가로 허수아비 축제

by 여니맘90 2025. 6. 19.

일본 시코쿠 지방의 산속 깊은 곳, 도쿠시마 현 이야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구불구불한 도로 끝에 조용히 자리한 작은 마을, 나가로가 나타납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여기저기서 사람처럼 생긴 존재들이 고개를 돌리고, 손을 흔들고, 밭을 일구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은 단 20여 명. 그런데 허수아비는 350개가 넘습니다. 나가로는 실제 사람보다 허수아비 인구가 훨씬 더 많은, 일본에서 가장 이상한 마을로 유명합니다.

이 허수아비들은 단순히 들판을 지키는 조형물이 아닙니다. 이 마을의 허수아비는 모두 실제 사람을 모델로 만들어졌으며, 한 명 한 명에게 이름, 성격, 과거의 직업이 있습니다. 마을을 거닐면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든 할머니,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심지어 창문 너머 회의 중인 공무원까지. 모두 허수아비로 복원된 마을 주민들입니다.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허수아비 마을은 이제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독특한 축제 장소로 알려졌고, 매년 가을에는 이를 기념하는 허수아비 축제가 열립니다.

 

허수아비 마을에서 하룻밤 – 일본 나가로 허수아비 축제
허수아비 마을에서 하룻밤 – 일본 나가로 허수아비 축제

허수아비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이 독특한 허수아비 마을의 시작은 한 여성, 아야노 츠쿠미 씨의 손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인 나가로로 돌아왔지만, 텅 빈 마을과 사라진 이웃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학교는 폐교되었고, 밭은 잡초로 덮였으며, 사람 소리 대신 바람 소리만 맴돌았습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던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은 허수아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첫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마을의 빈 공간마다 하나씩, 하나씩 이웃들을 본뜬 허수아비를 세웠고, 어느덧 마을 전체가 시간이 멈춘 듯한 허수아비의 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녀가 만든 허수아비는 단순한 인형이 아닙니다. 정확히 그 인물이 살던 자리에, 그가 자주 하던 행동을 기억하며 배치됩니다. 예를 들어, 학교의 선생님은 칠판 앞에서 수업을 하고 있고, 늘 고무신을 신고 시장에 가던 할머니는 장바구니를 들고 길모퉁이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입소문을 타면서 2010년대 중반부터 SNS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세계 각지의 여행자와 예술가들이 나가로를 찾아 사람 없이 사람스러운 풍경에 놀라움과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허수아비 축제의 날, 살아나는 마을


매년 가을, 나가로에서는 허수아비 축제가 열립니다. 마을 전체가 하루 동안 다시 활기를 되찾는 날입니다. 관광객과 마을 주민들이 어우러져 허수아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축제죠.

축제의 분위기는 전통 일본 농촌 마을 축제를 그대로 따릅니다. 대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허수아비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각종 지역 특산물 부스가 설치되어 찐 고구마, 지역산 곡물, 직접 만든 간장 등을 시식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이 축제의 주인공이 사람처럼 꾸며진 허수아비라는 점입니다. 각 허수아비마다 소개문이 붙어 있고, 어떤 허수아비는 방문객과 사진도 찍어줍니다. 물론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죠.

또한 축제 당일에는 허수아비 만들기 체험 코너도 운영됩니다. 나가로의 허수아비는 모두 손바느질로 제작되며, 신문지와 헝겊, 낡은 옷가지로 만드는데, 현장에서 직접 나만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완성된 허수아비는 원하는 장소에 세울 수 있고, 이름도 붙일 수 있어 축제에 참여한 흔적이 마을에 남게 됩니다.

밤이 되면, 허수아비들과 함께 야외에 모닥불을 피우고 도쿠시마 지방의 전통 민속춤인 아와오도리 공연도 열립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과 허수아비가 함께 어울리는 밤은 이 마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는 방식
나가로 허수아비 마을과 그 축제는 단순한 재미나 기괴함을 넘어서, 사라지는 마을에 대한 사랑과 기록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일본의 수많은 농촌 마을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가로 역시 한때는 수백 명이 살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이 사망하거나 도시로 떠났습니다.

허수아비는 없어진 존재의 자리를 채우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그리고 이 축제는 그 존재들을 잊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살아 있을 때 함께 나눈 기억, 표정, 말투, 자리… 모두가 이 마을에서는 허수아비를 통해 보존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용하고 쓸쓸한 마을은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문화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야노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떠나지만, 허수아비는 마을을 지킵니다.

 

축제의 다음 날 마을을 떠날 때, 돌아보면 허수아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시선을 통해 과거를 상상합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억과 존재의 경계를 걷는 여행을 했다는 느낌을 간직하게 됩니다.

나가로의 허수아비 축제는 단순한 이색 체험이 아닙니다. 이는 사라져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한 사람의 애틋한 마음에서 시작된 공동 기억의 예술입니다. 누군가에겐 으스스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따뜻한 위로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축제에 다녀온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허수아비들과의 하루가, 지금껏 경험한 어떤 축제보다 더 사람다웠다.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허수아비 마을은, 당신이 다음에 떠날 기이한 축제 여행지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축제가 끝난 뒤 마을은 다시 조용해집니다. 하지만 방문객들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 늘어납니다. 허수아비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사람이 없어 더 사람다운 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사진작가, 예술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나가로는 기억, 존재, 고독, 공동체라는 키워드를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독특한 공간입니다. 어떤 이는 마을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허수아비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허수아비를 통해 사라진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 나가로의 축제는 결국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껴안는 일종의 의식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속엔, 누군가의 사랑과 그리움, 기억이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